역사인물/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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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
홍양호
- 홍양호(洪良浩, 1724∼1802) 본관은 풍산,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조선 영조 때 급제,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두 차례 중국사신으로 왕래하면서 그곳 석학들과 교유하였고, 고증학 수입에도 기여했다. 홍주 합덕지와 연안 남대지 등을 중수하였으며, 벽돌, 수레 등의 사용을 주장한 실용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국방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일본 가는 통신사편을 통하여 활 만드는 재료로 쓸 수도 있는 벚꽃 묘목을 가져다 우이동 산기슭에 심어 꽃도 감상하고 활 재료로도 쓰게 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맹주되는 제후가 제단 위에서 소귀 즉 우이를 잡고 맹세하던 고사) 자신의 우이동 거주를 긍지로 삼기도 하였다. 『좬이계집』이 있으며, 『영조실록』, 『동문휘고』등 각종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최남선
- 최남선(崔南善, 1890∼1957) 본관은 철원, 호는 육당(六堂). 우리나라 신문학운동의 선구자로 근대문학을 개척하였으며 기미독립운동의 선언서를 기초하였다. 광문회를 만들어 고전을 간행했으며, 잡지 「소년」을 발행했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고, 시조집 『백팔번뇌』, 사서 『좬조선역사』등을 발간하였다. 1928년에 건립된 소원(素園, 우이동 5-1)에서 집필활동을 했으며, 정원에는 육당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기념비가 있는데 독립선언문이 음각되어 있다.
전설/설화
- 거북바위 - 강북구 미아동 산 837-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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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옛날 황해에서 거북이가 나와 한양을 기어다니니 이에 놀란 주민들과 군사들이 한강으로 쫓으려 하였으나, 거북이가 인왕산을 거쳐 북한산으로 기어 오르므로 아름다운 경치가 크게 훼손되었다.
이를 본 인왕산, 삼각산, 북한산, 도봉산의 산신령들이 거북이를 수락산 쪽으로 쫓으려 거북이와 산신령들간의 겨루기가 시작되어 현재 바위 위치에 와서는 격심한 싸움으로 변했다. 이를 보던 하느님이 난폭한 거북이는 커다란 바위로, 산신령들은 단풍나무숲으로 만들어 매년 가을 거북바위는 단풍속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하늘의 신선도 이 경치에 반하여 내려와 장기를 두는 등 놀이터가 되었고 그 후 좋은 휴식처가 됐다. 현재의 거북바위는 흉터가 많이 새겨있다. 미아동 산837-1040 주택가 내.
- 국망봉과 인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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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은 백운대, 국망봉, 인수봉의 3봉이 삼각으로 우뚝하여 삼각산이라고 부른다. 무학대사가 삼각산에 올라가 새 나라 도읍 터전을 정하였다는 전설이 깃든 봉우리가 국망봉이다.
북한산성 서쪽 서대문 밖에서 바라보면 노적가리가 높이 쌓아 올린 듯이 웅장장대하다. 그 모양이 노적과 같다고 해서 노적봉이라 부르게 된다.
이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고양군 숫돌고개에서 왜병과 접전을 하였다. 이 때 숫돌고개 남쪽 진기리에 늙은 할머니가 어디에선가 나타나서 떡을 팔고 있었다. 왜병들은 숨가쁜 싸움에 목이 타도록 갈증이 났다. 마침 그들은 노적봉 아래를 휘돌아 진기리 앞으로 흘러내리는 냇물에 다다랐다. 그런데 냇물이 뜨물과 같이 뿌옇길래 왜 냇물이 이러냐고 늙은 떡장수 할머니에 물으니, 그녀는 노적봉을 가리키며 저곳에 식량을 수만석 쌓아 놓고 대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군량미를 하도 많이 씻기 때문이라고 일러주었다. 이들은 냇물을 뜨물이라 여기어 마음놓고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그 할머니는 사람들을 시켜서 노적봉에 이엉을 두르게 하여 노적가리처럼 꾸미고 그 아래 개울에 회를 풀게 한다. 그리하여 회독(灰毒)으로 왜병들을 죽게 했다.
진기리 길가에는 머리 없는 지장보살 석상이 지금도 초연히 서있다. 임진왜란 당시 떡장수의 화신이라 하는데 일제 초기에 그네들이 지장보살의 머리를 잘라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