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구 문화재
글자크기
강북구 문화재
- 화계사 대웅전
-
- 지정번호 : 시 유형문화재 제65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화계사길 117(수유1동)
- 교통안내 : 한신대앞 하차
- 파랑버스
- 151, 121
- 녹색버스
- 1165
- 마을버스
- 강북02
- 우이신설
- 화계역 2번출구로 나와서 화계사 방향으로 진진 도보 15분
화계사는 원래 고려 초 탄문(坦文)대사가 이 근처인 부허동(浮虛洞)에 보덕암(普德庵)이란 절로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17년(1522)에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이 보덕암 신월(信月)선사와 협의 하여 옮겨 짓고, 화계사라 개칭하였다.
그 후 광해군 10년(1618)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가(德興大院君家)의 시주를 받아 5개월만에 전과 같은 규모로 다시 지었다. 고종 3년(1866)에는 흥선대원군의 도움을 받아 용선(龍船), 범운(梵雲) 두 선사(禪師)가 보수하였고, 고종 7년(1870)에는 용선, 초안 스님이 대웅전을 크게 다시 지었다.
화계사는 많은 명필을 갖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웅전(大雄殿)'의 현판글씨는 근세의 명필인 정학교(丁鶴喬) 의 글씨이고, 대웅전 네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과 '보화루(寶華樓)'현판은 신헌(申櫶:초명은 신관호)의 글씨이다. 또 흥선대원군은 '화계사(華溪寺)'와 '학서루(鶴棲樓)', '명부전(冥府殿)'을 써서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를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은 고종 7년(1870)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 기와집으로, 내부 천장 장식, 좌우 측면과 후면의 관장벽 등이 모두 조선말기의 화려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 사인비구주성동종(화계사 동종)
-
- 지정번호 : 보물 11-5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화계사길 117(수유1동)
- 교통안내 : 한신대앞 하차
- 파랑버스
- 151, 121
- 녹색버스
- 1165
- 마을버스
- 강북02
- 우이신설
- 화계역 2번출구로 나와서 화계사 방향으로 진진 도보 15분
조선 숙종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종의 어깨 부분과 입구 부분에 넓은 띠를 두루고 있으며, 몸통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위패 모양을 균형있게 배치하여 안정감을 준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 본원정사목조지장보살좌상
-
- 지정번호 : 시 유형문화재 제 136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각산로 1
- 교통안내 : 국립재활원 하차
- 파랑버스
- 151
- 녹색버스
- 1165
- 마을버스
- 강북 01
본원정사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지장보살상이다. 이 지장보살상은 삼각산 태고사에 있었는데 한국전쟁때 태고사에 불이나 본원정사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 있는 이 지장보살좌상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다소 넓적하고 큰 느낌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안정감을 준다. 이마가 넓고 두 귀가 크게 표현된 얼굴에 머리는 민머리 형태를 하고 있다. 몸체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지만 양감이 잘 표현되었다. 두어깨를 모두 감싼 옷은 자연스러운 옷주름을 만들면서 흘러 내려 온몸을 감싸고 있다. 특히 오른쪽 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이 팔에 걸쳤다가 다시 아래 입은 옷의 속으로 끼워져 있다. 지장보살좌상의 손부분은 원래의 것이 불에 타 다시 갈아 끼운 것이다. 전체적인 형태와 앉은 자세, 옷자락의 세부표현 및 착의법, 양감표현, 목조 재질이나 나무를 깍은 수법, 복장유물을 넣었던 구멍을 막은 기법 등의 면에서 18세기 초기 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목조지장보살좌상은 규모나 조각 수법, 양식적인 특징 등은 조선 후기 목조작을 대표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 창녕위궁재사
-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 40호
- 소재지 : 서울시 강북구 월계로 173
- 교통안내(동문 방면) : 북서울 꿈의 숲 동문 하차
- 파랑버스
- 100, 147
- 마을버스
- 강북09, 강북11, 성북14-1, 성북14-2
- 교통안내(서문 방면) : 북서울 꿈의 숲 서문 하차
- 녹색버스
- 1124
- 마을버스
- 강북05
창녕위궁재사는 조선조 제23대 순조의 둘째 따님 복온공주와 부마 김병주 선생의 재사(齎舍)이다. 강북구 관내 북서울 꿈의 숲 입구에 위치한 이 재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즙 건물로 우측의 사랑채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난 신경진의 별장이었으며, 복온공주의 후손 김석진 선생이 한일합방 때 울분을 참지 못하여서 순국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 오른쪽 사랑채는 신경진(1575~1642)의 별장으로 지어져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고가이고 좌측재사는 1800년대에 건축되었으며, 정면 안채는 해방 후 개축되었으나, 6.25전쟁시 폭격으로 재건축된 건물로 역사적 사실 및 건축양식 등이 매우 가치가 높다.
- 북한산성
-
- 지정번호 : 국가사적 제 162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양로173길 462
- 교통안내 :
- 파랑버스
- 101, 109, 120, 144, 151, 153
- 녹색버스
- 1167, 1144
- 마을버스
- 도봉02, 도봉05, 노원15
- 우이신설
- 북한산우이역 하차
북한산성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뺏고 빼앗기던 한강 북방 군사상의 요지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에는 개루왕 5년(132년)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11세기 초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관(棺)을 옮겨 온 일도 있었으며, 고려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여 7,620보의 석성이 만들어졌다. 조선 영조 21년(1745) 스님 성능(聖能)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는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와 행궁, 군창(軍倉)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등 12개 사찰, 99개소의 우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km이며 성안의 면적은 2백만 여 평으로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과 성곽들은 일부 보수, 복원되었다.
- 도선사 마애석불
-
- 지정번호 : 시 유형문화재 제34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양로173길 504
- 교통안내 : 우이동 종점하차
- 파랑버스
- 101, 109, 120, 144, 151, 153
- 녹색버스
- 1167, 1144
- 마을버스
- 도봉02, 도봉05, 노원15
- 우이신설
- 북한산우이역 하차
도선사 석불은 신라 경문왕 2년(862)에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조성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마애불(磨崖佛)계통을 이어 받은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도선사는 조선후기까지 보수하거나 재축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1903년에는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보수하였으며, 1904년에 국가기원도량(國家祈願道場)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1962년에는 청담(靑潭:1902-1971) 대종사가 호국참회불교를 제창하면서 이 석불이 영험있는 기도도량으로 알려졌으며, 1970년부터 1983년까지 혜명, 혜성, 현성스님 등이 주지직을 역임하면서 기존시설 50평을 확장 개수하여 200평에 이르는 야외법당으로 준공하였다.
현재 도선사 석불은 높이 20m의 암벽에 석불 높이 8.43m이며 몸통이 원통형으로 되어 있고, 석불 보호를 위해 보호각을 씌워 놓았다. 석불 앞에는 석탑과 석등이 있고, 석불 앞바닥은 불공드리기 편하도록 대리석으로 깔아 밤낮으로 기도하는 불자들의 야외법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 봉황각
-
- 지정번호 : 시 유형문화재 제2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 교통안내 : 우이동 종점하차
- 파랑버스
- 101, 109, 120, 144, 151, 153
- 녹색버스
- 1167, 1144
- 마을버스
- 도봉02, 도봉05, 노원15
- 우이신설
- 북한산우이역 하차
봉황각은 1912년에 세워진 천도교의 연성도장(煉性道場)으로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
천도교의 제3세 교조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선생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1912년 이곳에 봉황각을 세워 천도교 교역자들에게 종교적 수련을 통하여 보국안민의 역사의식을 심어 줌으로써 후일 3.1운동에 치밀하게 대비하였다. 이 곳에서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중앙과 지방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7차로 나누어 매회 49일씩 수련시키고, 조직화하였다. 봉황각에서 양성된 교역자들은 전국으로 퍼져 나가 1919년 3.1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손병희 선생께서도 7년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천도교 교리와 사상을 심화 확장함으로써 구국민중운동의 기초를 다지고 3.1운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였다.
내부 건물 구조를 보면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누마루와 방이 배치되어 있고, 뒤쪽에 방 2칸이 있다. 외관상으로는 일반 양식이 많이 가미되어 있다.